[공공리뷰] 연극 <마른 대지> - 래빗홀씨어터

김혜민 기자 / 기사승인 : 2020-08-18 13: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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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뉴스=김혜민 기자] * 본 공연은 극의 특성상 욕설 및 선정적인 대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출혈 장면이 연출되오니 관람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해 4월, 헌재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국회는 올해 말까지 법을 개정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이와 관련한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태아의 생존 문제와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중 무엇이 중요한가에 관한 토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안타까운 것은 법이 바뀐다 한들 낙태에 따라붙는 꼬리표가 여전할 거란 점이다.

연극 <마른 대지>는 이런 꼬리표를 떼고 시작한다. 임신 10주 차인 에이미는 달리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 부모님도, 친구도, 남자친구도 에이미의 문제 앞에선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이미와 에스터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이지수>

 

에이미는 같은 수영부 선수인 에스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예쁘고 파티에도 자주 가는 에이미는 에스터에게 동경의 대상일 뿐 친구는 아니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에이미와 에스터는 서로에게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에이미는 치어리더를 했었고 꿈은 작가이며 허먼 멜빌과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에스터는 전학 오기 전 수영 코치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이었는지 얘기한다.

에이미의 친구는 에이미가 그런 꿈을 갖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친구가 에이미의 작문을 비웃자 에스터는 “아니야, 에이미 글 잘 써”라고 대답한다. 에이미는 작가라는 꿈이 들킬까 “너 나 좋아하지?”라며 과하게 에스터를 몰아붙인다.

에이미가 속한 집단에서 <모비딕>과 레이먼드 카버의 문체를 대화 주제로 삼는 건 ‘쿨한’ 게 아니다. <마른 대지> 번역을 담당한 함유선 씨는 “사춘기 애들은 본능적으로 상대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이 뭔지 알아요. 에이미에게 작가라는 꿈은 들키기 부끄러운 거죠. 자신이 속한 집단과 동떨어진 가치니까요”라고 설명했다.

 

▲에이미와 친구 라비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이지수>

에스터는 에이미와 서먹해진 상태로 대학 실기 시험을 치르러 간다. 마지막 기회인 만큼 에스터는 일주일간 수영복을 벗지 않아 등에 발진이 날 만큼 긴장한 상태다.

다행히 에스터는 좋은 성적을 거둔다. 좋아서 하는 수영이지만 계속 압박을 받아 장애물처럼 느껴지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에스터는 에이미에게 약을 사라고 빌려준 체크카드를 돌려달라며 소리를 지른다. “많이 컸다”는 에이미에게 에스터는 “나 너 안 무서워”라며 맞선다. 싸우던 도중 에이미는 진통을 겪고 에스터는 곁에서 모든 과정을 함께 한다. 자기한테서 떨어지라는 에이미에게 에스터는 “싫어”라고 대답한다. 에스터가 처음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마른 대지>는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를 겪는 사춘기 청소년을 피해자라고 보지 않는다.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대상으로 둔다. 에스터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게 다른 사람은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에이미에겐 임신이 그런 문제다.

배우 황은후 에게 에이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물었다.

“에이미는 여자 고등학생을 성적 대상화 하는데 치를 떨어요. 치어리더를 하면서 자신이 겪은 일이죠. 하지만 동시에 성적 호기심도 있어요. 작가가 꿈인 것도 성에 관련해 이율배반적인 태도도 어울리는 친구들에겐 내보이기 힘든 모습이에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갑옷을 입은 셈이죠.”

에스더 역을 맡은 김정 배우는 “에스터에게는 수영 시험이 큰 문제였어요. 그걸 해결하고 나선 기분이 고양돼서 에이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요. 확실한 건 둘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유일한 존재라는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출혈 장면이 있다는 주의문을 읽었고 17세 이상 관람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연출이 파격적이란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연출을 맡은 윤혜숙 씨는 “원작자인 루비 래 슈피겔(Ruby Rae Spiegel)이 작가 노트에 ‘에이미 역을 맡은 배우는 노출에 거부감이 있어선 안 된다. 낙태 장면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적어뒀어요. 낙태가 숨겨져야 할 일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거죠”라고 설명했다.

낙태는 모른 척한다고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윤혜숙 씨는 락커룸이 오래된 공간처럼 보이길 원했다고 했다.

“비위생적인 공간이죠. 의학적인 도움을 줄 사람도 없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잖아요. 사회가 보호하지 않으면 계속 일어날 일이기도 해요.”

 

▲에스터와 에이미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이지수>

<마른 대지>는 결국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에이미는 피해자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에스터는 조력자로 에이미를 돕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둘은 온전한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떤 해결방법을 찾느냐는 결국 본인의 몫이다. 고통스러운 순간은 삶의 궤적이 되고 성장의 거름이 된다. <마른 대지>는 낙태와 삶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만날 경험이 돼 줄 것이다.

 

김혜민 기자 enam.he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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