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계덩어리> 프랑스행 ‘설국마차’…'가진 자'의 폭력

김승직 기자 / 기사승인 : 2020-05-24 18: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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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뉴스=김승직 기자]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계급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이와 비슷한 소재로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한 소설이 있다. 기 드 모 파상의 <비계덩어리>다.

한겨울 새벽, 마차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 마차 안에는 귀족·수녀·자본가·상인·정치인 등 9명과 ‘비계덩어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매춘부가 타고 있었다.

당시는 보불전쟁이 전쟁이 한창이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연파하며 북부 도시 루앙을 점령했다.

마차에 오른 이들은 루앙 시민이었다. 이들은 프로이센 장교의 환심을 사 프랑스 지배하의 마을로 가는 여행 허가증을 받았다.

승객들 사이에선 묘한 기류가 흐른다. 이들 중 대부분은 사회적인 지위가 높거나 금전적 여유가 있는 인물이었기에 매춘부의 존재에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안개와 눈발이 짙어져 예정된 시간에 중간기착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마차 안엔 별다른 먹을거리가 준비돼 있지 않았고 전시 상황이었던 탓에 이들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이때 매춘부가 미리 준비해뒀던 포도주와 고기를 꺼내 승객들과 나눠먹으면서 분위기는 전환된다.

이들은 식사 중 담소를 나누며 매춘부의 이름이 엘리자베스 루쎄라는 것과 그녀가 프로이센 장교를 죽이려다 실패해 도피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승객들은 그녀를 애국자라고 추켜세운다. 앞서 그녀를 매춘부라 조롱하던 이들도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이에 동참한다.

이윽고 마차가 중간기착지에 도착하면서 이들의 불안감은 해소되는 듯했지만 이튿날 마차가 출발하지 못하면서 상황이 급박해졌다.

여행 허가증이 있음에도 그 지역을 담당하는 프로이센 장교가 이들의 출발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장교가 원하는 것은 엘리자베스와의 잠자리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 승객들 역시 자신들을 추위와 허기에서 구해준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 소설 비계덩어리 <사진=구글이미지>

그러던 중 중간기착지 주변에서 대대적인 교전이 있을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승객들은 불안감에 초조해한다.

이에 승객들은 “멋진 몸매의 프로이센 장교가 적국 사람이라서 아쉽다”는 식의 바람을 넣으며 엘리자베스에 그와 잠자리를 하라며 종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뜻을 굽히지 않자 이들은 “매춘부가 자신의 신분을 잊고 상대할 남자를 가린다”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론 “신은 순수한 목적에서 행한 죄악을 용서한다”며 그녀의 양심에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이를 못이긴 엘리자베스는 장교와 잠자리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마차는 출발한다.

엘리자베스는 수치심에 떨며 뒤늦게 마차에 올라타지만 승객들은 그녀를 철저히 외면한다. 심지어 그녀가 불결하다며 접촉을 꺼렸다.

이윽고 마차는 교전 지역을 벗어났다. 승객들은 이를 자축하며 식사를 한다. 하지만 미처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엘리자베스에게 식사를 권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린다.

다만 공화파 민주주의자인 정치인이 이들의 뻔뻔함을 상기시키려는 듯 프랑스 국가를 부를 뿐이었다.
▲ 기 드 모파상 <사진=구글이미지>

기 드 모파상은 사실주의 소설의 대표 격으로 거론되는 작가다. 그의 소설 <비계덩어리> 역시 담백하고 적나라한 문체로 마차의 상황을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달한다.

또 소설이 전하고 싶은 주제나 이를 위한 장치가 그대로 드러나 독자는 쉽게 화두에 도달할 수 있다.

언뜻 이 소설은 마차에서 이뤄지는 부조리를 다루는 듯하지만 구성원의 직업을 보면 이 마차는 하나의 작은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엘리자베스가 당하는 설움은 단순히 매춘부로서가 아닌 하위계층이 당하는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떻게 특권계층이 하위계층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만드냐는 것이다.

승객들은 엘리자베스와 장교의 잠자리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녀를 칭찬으로 회유하거나, 비난하고 겁박하거나, 양심에 호소하는 등 온갖 방법을 사용한다.

여기서 엘리자베스를 움직인 방법은 그녀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승객들은 다수를 위해 엘리자베스가 희생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며 이를 위한 죄악은 신께서도 용서한다는 식으로 그녀를 설득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희생으로 수혜를 입은 사람은 엘리자베스가 아닌 나머지 승객이다.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엘리자베스가 느낀 배신감과 수치심은 독자의 공감을 끌어낸다.

‘전시의 마차 안’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있지 않을 뿐 우리 주변에선 이런 식의 폭력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만일 우리가 현실에서 엘리자베스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비계덩어리>는 '가진 자'의 끊임 없는 폭력에 노출된 우리의 현실 새삼 일깨워 준 거울인 셈이다.

 

김승직 기자 reporter@nex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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